본래의 온전함 — 태아의 낙원
우리는 모두 태어나기 전 자궁 안에서 본래의 온전함을 경험했다고 여겨진다. 마틴 부버의 말을 빌리면 "태아의 삶을 살았을 때, 우리는 우주와의 깊은 친교를 이루며 살았다." 이 에덴동산의 상태는 태어남과 함께 갑자기 끝난다.
공생 · 애착 · 에로스
생후 몇 달, 아기는 아직 자신과 세계를 구별하지 못한다. 이어 공생적 관계(Symbiotic Stage)가 열리며 아기는 양육자와 하나로 연결되고 싶은 열망 — 애착 충동 — 을 경험한다. 이 그리스어 에로스(Eros)는 흔히 낭만적 사랑을 뜻하지만, 본래는 '생명력'이라는 더 넓은 뜻을 지녔다.
이 시기에 자신과 타인을 구별하면서 동시에 연결됨을 느끼는 데 얼마나 성공했는가는, 훗날 모든 인간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위험한 여정 — 반드시 남는 상처
아기의 요구는 끊이지 않는다. 배고픔, 기저귀, 안기고 싶은 몸의 갈망 — 이 모든 것이 즉각적으로 채워져야 아기는 세상을 안전한 곳으로 배운다. 어떤 부모도 그 모든 욕구를 완벽히 채우지 못한다. 그래서 누구나 어린 시절의 보이지 않는 상처를 지닌 채 자란다.
고립된 사람과 융합하는 사람 — 뜻밖의 짝짓기
18개월 무렵의 자율과 독립 단계에서 아이는 부모 곁을 벗어나 세상을 탐험하려 한다. 이때 부모의 반응이 두 가지 상반된 성격을 만든다.
- 고립된 사람 — 자율성이 방해받아 "삼켜질까 봐" 두려워한 아이. 어른이 되어 사람들과의 거리를 두고, 구속받지 않으려 하며, 널찍한 공간을 필요로 한다.
- 융합하는 사람 — 편안함을 찾아 다가갈 때 밀쳐진 아이. 정서적 버림받음을 겪었기에 채워지지 않는 친밀감의 갈망을 안고 산다.
참으로 역설적인 것은 이 고립된 사람과 융합하는 사람이 성인이 되어 서로 결혼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때부터 밀고 당기기의 짜증나는 게임이 시작된다.
잃어버린 자아 — 사회화의 상처
어린 시절의 상처에는 또 하나의 결이 있다. 우리가 이 사회와 문화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억압해야만 했던 나의 일부다. 사라라는 여성은 어릴 때 어머니로부터 "너는 오빠만큼 똑똑하지 못하다"는 메시지를 반복해 들었다. 15세에 처음 좋은 성적표를 받아 오자 어머니는 "다시는 이런 일이 네게 일어나지 않을 거다"라고 말했다. 사라는 그 후로 이성적 사고를 스스로 잠재웠다. 사고하는 자신을 인정하는 것은 어머니에 대한 반박이었고, 어머니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은 곧 생존의 위협이었기 때문이다.
육체적 금기 · 허락되지 않은 감정
몸에 대한 금기(생식기·성적 감각), 그리고 특정 감정(특히 분노)에 대한 금지는 거의 모든 문화에서 공통된다. 아이가 자신의 감정을 인정받으며 자랐다면 그 감정과 함께 머무를 수 있는 온전함을 유지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러지 못한다. 결국 우리는 자기 자신을 일부만 인정받은 존재로 자란다.
세 가지 자아
- 잃어버린 자아(Lost Self) — 사회의 요구 때문에 억압해야만 했던 나의 일부.
- 거짓 자아(False Self) — 그 공허함을 메우기 위해 만든 가식적인 겉모습.
- 거부된 자아(Disowned Self) — 거짓 자아의 부정적 부분으로, 인정받지 못해 거부된 자아.
일상의 나로 인식되는 부분은 본래의 성품 일부와 거짓 자아 일부의 결합이다. 잃어버린 자아는 거의 인식되지 않고, 거부된 자아는 의식 바로 아래에서 언제라도 튀어나올 기회를 노린다.
반쪽을 찾아 헤매야 하는 운명
플라톤의 『향연』에는 이런 신화가 있다. 원래 인간은 두 얼굴과 네 팔을 가진 완전한 존재였다. 신들에게 도전한 벌로 제우스는 그들을 둘로 나누었고, 반쪽이 된 인간들은 남은 인생을 자신을 온전하게 해 줄 나머지 반쪽을 찾아 헤매게 되었다.
이 신화가 말하는 이상형은 아무나가 아니다. 그 사람은 내 안 깊은 곳에서 "이 사람이야말로 내가 그토록 찾던 바로 그 사람이야"라고 인식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찾는 그 사람은 뜻밖에도 부모의 긍정적 성향과 부정적 성향을 모두 지닌 사람이다.